영머신·2026.06.14'수랭·고성능'에 던진 반기, 가와사키 제퍼 탄생 비화
레플리카 전성기 시절, 모두가 고성능을 쫓을 때 '평범한 바이크'의 잠재력에 주목한 남자가 있었다. 가와사키 Z의 계보를 잇는 명차 제퍼(ZEPHYR)의 숨겨진 개발 스토리를 공개한다.



가와사키 Z의 계보를 잇는 제퍼 시리즈는 오늘날까지도 라이더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명차다. 처음부터 대히트가 약속된 모델처럼 보이지만, 그 탄생 과정에는 흥미로운 비화가 숨어 있다. 제퍼의 개발 주역들이 과거 헤이세이(平成) 시대에 밝혔던 생생한 증언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이 기사는 영 머신(Young Machine) 2008년 10월호에 게재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레플리카 전성기, 전혀 다른 미래를 본 남자
1986년 4월, 영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나카지마 나오유키(中島直行) 씨가 일본 국내 마케팅을 담당하는 가와사키 오토바이 판매(현 가와사키 모터스 재팬)의 판매추진부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일본 이륜차 시장은 레이서 레플리카 열풍이 불어닥친 시기였다. 국내 4대 제조사가 앞다투어 고성능 신형 레플리카를 쏟아내며 경쟁을 벌이던 그때, 나카지마 부장만큼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카지마 나오유키 씨는 1940년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태어나 1965년 가와사키 항공기 공업에 입사했다. 제퍼를 탄생시킨 가와사키 내수 모델의 주역이자, 1990년대 이후 에스트레야나 W650 등 오늘날의 네오 레트로 붐을 앞서간 혁신적인 모델들을 잇달아 성공시킨 인물이다.
"첫 아이디어는 Z2를 1,000대 한정으로 복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조 원가를 계산해 봤는데, 금형 비용에서 0을 하나 빼먹는 실수를 저질렀죠. 회의 때 당시 기술부장이 이를 지적했고, 제대로 다시 계산해 보니 대당 단가가 200만 엔이나 나오더군요.(웃음)" 당시는 대형 바이크 면허(한정 해제)를 취득하기가 매우 어렵던 시절이었다. 선택받은 라이더들의 전유물이자 터프한 라이딩의 상징이었던 가와사키 Z 시리즈는, 레플리카 열풍 속에서도 중고차 가격이 치솟으며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나카지마 부장의 원래 계획은 약 100만 엔의 가격표를 붙인 프리미엄 복각 Z2를 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Z2 복각판을 그대로 출시하는 데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이미 비싼 값을 치르고 중고 Z2를 구입한 기존 오너들에게 실례가 될 뿐만 아니라 반발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게다가 Z의 크랭크샤프트는 조립식 구조인데, 이를 다시 생산하려면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이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갑니다. 예전 금형은 진작에 폐기되었고, 새로 만든다 해도 제작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상황이었습니다."
1986년 6월의 일이다. 결국 Z2 복각 안은 회의에서 반려되었고, 대신 가격 부담을 낮춘 400cc 모델 개발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1973년에 출시된 가와사키 750RS(Z2). 제퍼 개발의 시발점이 'Z2 복각 계획'이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만약 그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1986년〉 제퍼 개발로 이어진 가와사키 사내 동향 요약

수냉 엔진을 탑재한 GPZ400R이 판매 호조를 보이던 1986년, 제퍼로 이어지는 상품 기획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나카지마 씨의 구상이 시작된 지 3년 만인 1989년, 마침내 제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Z2 복각 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보다 더 전인 1982년이나 1983년쯤이었을 겁니다. 당시 상사가 '앞으로 엔진은 수냉으로 단일화하고, 일부 공랭 엔진은 단종시키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죠. 수냉식으로의 전환 흐름과 여러 기종에 걸친 금형 유지 보수 비용 등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바이크 가격이 너무 비싸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와사키는 GPZ900R을 필두로 GPZ400&600R, GPZ250R, KR250, 그리고 AR125에 이르기까지 라인업 전반을 수냉화로 급격히 전환하려던 시점이었다. 수냉화를 통해 고성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카지마가 우려했던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가 판매추진부장으로 취임한 1986년 당시, 시장의 400cc 스포츠 바이크 가격은 70만 엔 선을 위협할 정도로 치솟아 있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을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대리점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특히 중장년층 고객들 사이에서 '타고 싶은 바이크가 없다'는 불만이 많더군요. 게다가 당시 유행하던 레이서 레플리카는 포지션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이런 바이크는 오래 탈 수가 없다'는 지적이 사내에서도 나왔고, 제조사라면 모름지기 다양한 고객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기획 회의 때 '공랭 400cc 엔진을 얹은 지극히 평범하고 표준적인 바이크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사업본부장이 '얼마나 팔 생각이냐'고 묻길래, 저는 '첫해 5,000대, 2년 차 3,000대, 3년 차 2,000대 해서 총 1만 대는 반드시 팔아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쳤죠. 그러자 '그럼 한번 해봐라'라며 기획이 통과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가격이 저렴하고 타기 쉬우며 남녀노소 누구나 다룰 수 있는 바이크라면 무조건 통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퍼의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나카지마 씨가 선택한 공랭 400cc 엔진은 곧 직렬 4기통을 의미했다. 동급 최초로 DOHC 헤드를 탑재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Z400FX로부터 이어져 온 가와사키의 전통적인 유닛이다. 이 시점에서 나카지마 씨의 머릿속에 그려진 바이크는 결국 무산되었던 Z2 복각안과 겹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반대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공랭 직렬 4기통 엔진을 활용해, 실제로 어떤 바이크를 만들어내야 했을까?
개발 승인은 떨어졌지만, 오직 고성능만을 쫓던 당시 흐름에 역행하는 제품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개발 지시를 받은 상품 기획 담당 요시다 다케시를 비롯한 현장 개발진의 고민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수냉식 GPZ400R이 한창 주가를 올리며 판매량을 늘려가던 1986년, 제퍼의 기획이 첫발을 내딛었다.
개발 코드네임은 궁극을 뜻하는 '999'

[요시다 다케시] 1949년 카가와현 다카마쓰시 출생. 1972년 가와사키 중공업 입사. 제퍼 400/750의 아버지. 품질 보증과 테스트 부서를 거쳐 GPZ900R 이후 수많은 상품 기획에 참여했다. 제퍼 개발 당시에는 나카지마가 기틀을 잡은 '프라이스 400' 콘셉트를 바탕으로, Z의 이미지를 강하게 투영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갔다. 훗날 초대 제퍼(C1)를 직접 구입해 일상 출퇴근용으로 애용하기도 했다.
나카지마의 구상은 '공랭 400cc 보급형 바이크 개발 지시'라는 형태로 가와사키 중공업 상품개발과의 요시다 다케시에게 전달되었다. "위에서 '저렴한 바이크를 만들라'는 지시는 내려왔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갈팡질팡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당시 400cc 클래스 시장은 풀 카울을 두른 레이서 레플리카가 시장 점유율의 60%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고, 가와사키 역시 GPZ400R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아직 '네이키드'라는 단어조차 없던 레플리카 전성기 한복판에서 보급형 400cc 개발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1986년 6월, 도쿄 고엔지 영업소에서 Z2를 타던 영업사원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Z2가 얼마나 멋진 바이크인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절대적인 성능뿐만 아니라 조형미, 그리고 직접 손질하며 타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이죠. 그때 이런 세계도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라이더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1987년 4월 가와사키 내부에서 작성된 400cc 시장 분석 자료다. 시장의 60% 이상을 레플리카가 장악하고 있던 절대적인 레플리카 전성기 시절, 개발 코드네임 '999'가 파고들 틈새를 모색했다. 결국 공략해야 할 타깃이 명확해지면서 제퍼의 대략적인 콘셉트가 완성되었다. (TTL은 Total의 약자)
제품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Z의 이미지를 투영하겠다는 구상이 구체화되었다. "당시 제퍼와 같은 1989년식 모델로 ZXR400의 기획도 동시에 진행 중이었는데, 개발 인력은 대부분 그쪽에 쏠려 있었습니다. 반면 보급형 400cc 담당 팀은 뭐랄까, 그냥 바이크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의 모임 같았죠(웃음).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엘리트 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개발 콘셉트에 대한 열정만큼은 뜨거웠기에 개발 번호를 '999'로 정했습니다. 궁극을 뜻하는 숫자 '9'를 세 개나 붙인 것이죠."
제퍼는 당시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설계되었지만, 눈에 띄는 첨단 메커니즘은 탑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와사키 Z의 혈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젊고 신선한 감각을 담아낸 스타일링은 단연 돋보였다.

프로젝트 999의 최종 단계 스케치다. 다이아몬드 프레임과 모노 서스펜션 등 다양한 구성이 검토되었으며, 머플러가 보이도록 차체 왼쪽을 기준으로 그려졌다.
"디자인은 야마우치 리더를 중심으로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우에모토, 아오키, 타마시마, 이노 등이 담당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머플러에는 이런 아이디어도 있었죠.(사진을 보여주며)"
아쉽게도 사진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엔진 아래에 서브 챔버를 두고 그곳에서 좌우로 4개의 얇은 테일 파이프를 뽑아낸 형태였다. 새로운 머플러 레이아웃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멋이 없다"라며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당시 판매 회사에 있던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KFR(가와사키 프레시 리포터)의 의견도 디자이너들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주행감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죠. 일반적인 테스트 라이더가 평가했다면 혹평을 면치 못했을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이 바이크의 콘셉트를 깊이 이해해 줄 인물로 사이토 쇼지 씨를 지목했습니다."
■ 제퍼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
가와사키가 제퍼를 개발하며 중요하게 여겼던 핵심 포인트들이다. 당시 유행하던 레플리카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독자적인 가치관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개발진조차 놀라게 만든 예상치 못한 대히트
1988년 9월, 최종 클레이 모델(목업)이 사업부장의 승인을 받으며 '프로젝트 999'는 반환점을 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프로젝트를 발안한 나카지마 씨가 미국으로 부임하면서, 정작 현장에서 이 콘셉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팔아줄 사람이 사라지는 위기를 맞았다. "기술이나 시각적인 면에서 눈에 띄는 참신함이 없다 보니, 판매 부서에서는 출시 직전까지도 '정말 이대로 낼 거냐? 새로운 세일즈 포인트는 없냐?'라며 다그쳤습니다. '이건 그런 성격의 바이크가 아니다, 레플리카와는 싸우는 링 자체가 다르다'라고 몇 번이고 설득했지만, 그럴 때마다 판매 계획 수량은 오히려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왼쪽부터 상품 기획을 맡았던 요시다 타케시, 엔진 설계의 야스치카 신, 차체 설계의 후지모토 유키노리, 디자인 담당 야마우치 토루, 그리고 제퍼 750의 차체 설계 전반 및 서스펜션을 담당한 나가야스 미야비 등 바이크에 미쳐있던 개발진들의 모습(1992년 촬영).
수많은 우려 속에서 코드네임 '999'가 완성됐다. 하지만 정작 이름이 없었다. "인증 신청 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도무지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광고 홍보를 담당하던 대행사의 미국인 직원에게 목업 모델을 보여주고 콘셉트를 설명한 뒤 아이디어를 몇 개 받아봤죠. 그 제안서 속에 바로 'Zephyr(제퍼)'가 있었습니다!"
후보군 중에는 '스트레이퍼(Strafer)'나 'Z-코브라(Z-Cobra)' 같은 이름도 있었다고 한다. "딜러 대상 신년 발표회 당시 이미 실차는 완성된 상태였지만, 후임 담당자가 어차피 안 팔릴 것이라 판단해 발표를 미뤘다고 하더군요(웃음). 그만큼 사내에서도 기대치가 낮았던 겁니다. 미디어 발표회는 도쿄 힐튼 호텔에서 열렸는데, 본사가 있는 아카시에서 올라간 사람은 저와 개발진, 그리고 홍보 담당자 정도였습니다. 임원진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죠."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는 대흥행이었다. 출시 첫해인 1989년 7,300대를 시작으로 1990년 1만 3,499대, 1991년 1만 6,261대, 1992년 1만 6,861대, 그리고 5년 차인 1993년에는 1만 2,906대를 기록하며 시장을 뒤흔들었다.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일본 잡지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팔릴 줄은 꿈에도 몰랐죠. 중장년층이 주로 살 줄 알았는데, 젊은 라이더들에게 인기가 집중된 것도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나카지마)



1989년에 출시된 제퍼에는 1979년식 Z400FX에 뿌리를 둔 엔진이 탑재됐다. 직렬 4기통 DOHC 방식이면서도 공랭식 2밸브를 채택한 이 메커니즘은, 수냉식 4밸브 엔진이 당연시되던 1986년 당시 기준으로도 이미 '과거의 유물'로 여겨지던 스펙이었다. 나카지마 씨의 과감한 결단이 없었다면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일본 국내 400cc 시장, 제퍼 출시 전후의 판도 변화








제퍼가 데뷔한 1989년을 기점으로 레플리카의 기세가 급격히 꺾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퍼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이후 모터사이클 시장은 네이키드와 아메리칸 크루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당시 ZXR400의 연간 판매 계획은 약 1만 대였던 반면, 제퍼는 연간 1,500대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기분 좋은 오판이었다. 기존 Z2 세대가 아닌 젊은 라이더들이 폭발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열정이 시장의 숨은 니즈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결과였다.
"초기 생산 라인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이후 증설을 거쳐 연간 1만 5,000대 수준까지 생산량을 늘렸습니다." (나카지마)
1988년 말 일본으로 돌아온 나카지마는 에스트레야(Estrella), ZRX, W650의 판매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제퍼는 그야말로 '뜻밖의 수확'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자식이 의외로 크게 출세한 격이죠. 어느 정도 가능성은 예상했지만, 설마 1만 대 넘게 팔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라인업의 빈틈이나 메워줄 제품 정도로 생각했으니까요." (나카지마)

제퍼 400의 흥행에 힘입어 가와사키는 1990년 750, 1992년 1100 모델을 잇따라 시장에 투입했다. 이로써 3형제 라인업을 완성하며 Z1/Z2 레플리카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다.

요시다 다케시(吉田武) 씨와 나카지마 나오유키(中島直行) 씨.
레플리카 붐의 쇠퇴기와 맞물려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제퍼는 이후 시장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이를 '제퍼 현상'이라 불렀고, 심지어 모 자동차 제조사에서는 이 흥행 비결을 파헤치기 위해 차량을 완전히 분해해 분석하기까지 했다. 물론 부품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특별한 비밀이 나올 리 없었다. 나카지마는 제퍼를 두고 "그저 흔하디흔한 바이크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평범함'이 라이더들이 갈망하던 본질이었으며, 이는 훗날 제퍼 750/1100과 ZRX 등 '헤이세이 시대의 Z'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네이키드 붐이 사그라든 이후에도 제퍼는 환경 규제의 파고가 덮치기 전까지 오랫동안 생산을 이어갔다. 4밸브 엔진을 얹은 제퍼 χ(카이)의 2008년형 파이널 에디션을 끝으로 단종되었으나, 그 직후부터 중고 시장에서 몸값이 치솟으며 프리미엄 모델로 대접받게 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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